면(면직물)의 역사
BC 약 3000년에 고대 인도의 것으로 짐작되는 인더스강 유역에서 발견된 금속기에 붙어 있는 면포가 가장 오래된 유물이다. 면의 원산지는 인도로서 데칸고원 북서부의 펀자브 지방은 BC 2000년대의 면직 기술의 원천지이자 독점자였다. 서기 327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인도 원정시 이를 발견함으로써 페르시아·이집트·북아프리카·에스파냐 등지의 지중해 연안을 거쳐, 인도의 독점이었던 목화재배·면직 기술이 처음으로 서구로 흘러 들어갔다. 그러나 서구의 면직물은 오래도록 미미한 상태에 머물렀으며, 본격적인 전파는 1498년 인도항로가 발견되어 서구와 인도 사이에 해로교통이 트이고나서부터이다. 이보다 1세기 앞서 인도의 면업은 육로를 통하여 중국을 거쳐 한국에 전래되었다. 역시 15세기 말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대륙을 발견했을 때 이미 그곳 원주민들은 면직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다고 함에 따라 아메리카대륙의 면업은 인도를 중심으로 한 동방(한국·중국)이나 서유럽보다 빨랐음을 알 수 있다. 서유럽에서는 17세기에 동인도회사를 통한 인도산 면직물의 대량수입에 의존하다가 수요량이 계속 늘어나자 종래의 수직기나 족답기에 의한 면직 기술의 개선을 시도하였다. 한국에서 면직물의 생산 및 사용은 직물·견직물·모직물보다 늦었다. 즉, 한국 고래의 무명베는 삼베·모시·명주보다 늦게 생겨났다. 고려 말 원(元)나라로부터 목화재배·면직 기술이 처음 전해 내려온 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세종대왕이 한글 서적인 농사언해를 편찬하여 면업을 장려하게 되면서부터 면직물은 크게 융성하였다. 이때부터 면포는 주의류로서 마포보다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조정에서는 조세 물품으로, 장터에서는 물물교환의 주거래 품으로, 중국·일본 및 남방 아시아와의 주교역 품이 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면직물은 무명, 광목, 옥양목이다. 각종 고문헌에는 우리나라의 면직물이 면포, 목(목, 옥양목, 관목, 청목, 홍목, 흑목)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무명이라는 기록도 있다.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이 목화 재배에 성공하고 그 뒤 호승, 홍원에게 직조기술을 배워 가비에게 한필의 직물을 짜게 하여 면직물 재직을 시작한 뒤 10년도 못 되어 이 직물이 전국으로 퍼지게 되었는데, 공양왕 3년(1391)에는 백성에게 값비싼 비단 대신 무명을 쓰라는 영을 내렸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태종 1년(1401)에는 백성 상하가 다 무명옷을 입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도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면직물이 일본으로 수출되는 품목에 들어있고, 세종 즉위년(1418)에는 1,539필이던 것이 차차 늘어 세종 5년(1423)에는 2,640필의 면포가 일본에 수출되었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이 있다. 조선시대 면포는 당시 일본에서는 고가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 조선의 면업이 본격적으로 일본에 전파되었다. 조선 중기부터 면포에 대한 조정의 조세 수탈로 농가에서는 생산 의욕을 잃게 되었다. 한국의 전통적인 베틀로 짜는 면포는 농가의 주요한 부업이었으나, 더 이상 면포를 위한 품질 향상이나 기술개발 또는 자본형성이 있을 수 없었다. 조선 후기 개항 이후에는 청(淸)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이 수입해 들여온 세련된 세포(細布)인 옥양목에 수요가 몰리게 되자, 농가 재래의 무명베는 쇠퇴하기 시작하였으며, 베틀에 의한 가 내수공업적인 생산방식은 탈바꿈하게 되었다. 20세기 초를 전후하여 비록 영세하나마 기업적인 공장공업으로 조금씩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서구식 역직기 몇 대씩을 도입한 근대적인 공장이 몇몇 생기는가 했더니, 투박한 조포(租布)인 광목만을 생산할 뿐 그 품질은 영국산 또는 일본산의 광목이나 옥양목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이에 국산 광목이 국민의 기호를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결국 외산 면포의 수입은 계속 늘어갔다. 때마침 일본의 대륙침략이 시작되고, 뒤늦게 한국에서 면직 기술을 배워갔던 일본은 일찍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면직물공업이 근대화되어서 자국산 면포로 자급하고 남자 한국에 수출시장의 거점을 마련하기 위하여 을사보호조약의 체결 직후인 1906년에 ‘조선 면화 주식회사’를 설립, 한국 토산 목화를 가져다가 면사를 생산해서 한국에 되팔았다. 이어 1917년에 역시 일본 자본인 ‘조선방직 주식회사’를 부산에 설립하여 면포를 생산해서 한국 시장에 팔았다. 이로써 한국은 일시에 일본 면방직공업의 원료생산지, 가공기지 및 소비지로 전락하였다. 1919년 김성수가 “우리 옷감은 우리 손으로”라는 독립적인 자각하에 서울 영등포에 처음으로 우리 자본에 의한 ‘경성방직주식회사’를 창립하였다. 그 무렵 인도의 목화를 싸게 가져다가 면포를 생산해서 비싼 값으로 되파는 영국의 경제침략에 항거하기 위하여 손수 물레를 돌리는 간디로부터 영향을 받은 김성수는 우리 자본으로 면포를 대량 생산하여 면포의 수입을 방지할 목적이었다(당시 한국의 면포 수용통계에 의하면, 금액으로 연 4,200만 원중 2,700만 원이 수입 면포 값이었다고 한다). 이것이 한국 면직물공업이 본격적으로 근대화하기 시작한 첫 출발이었으며, 우리 자본에 의해 면직물이라도 자급하고 나아가서는 경제자립을 통한 독립이념의 실현을 위해 형성된 민족자본의 태동이었다. 이후 일본 자본의 면직물공장이 계속 설립되어, 8·15광복 직전에는 내산만으로 면포를 충당할 수 있었다. 광복 직후의 혼란과 6·25전쟁으로 인한 피해로 면포의 공급은 한때 태부족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의 정부의 경제부흥시책에 힘입어 1960년대에는 자급을 넘어 수출하기 시작하더니, 1970년대에 들어와 한국의 면직물공업은 공장의 대형화, 시설의 현대화를 통하여 대량 생산체계와 수출산업으로서의 기반 확충을 꾀한 나머지 세계 유수의 면직물공업국으로 발전하였다. 면직물의 국민 1인당 소비량은 국민소득의 증가와 함께 증가일로에 있으며, 특히 P/C를 비롯한 면 혼방직물이 순면직물보다 더욱 실용적인 직물로서 정평을 받아 그 생산·소비·점유율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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